발신자 불명

https://youtu.be/LI1pTkW6Cfc

 

 

“어때요?”

“잘 어울려.”

 

여자는 선물 받은 옷을 입고는 선물을 한 남자의 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치마 끝이 마치 꽃잎처럼 너풀거리며 움직였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여자의 손을 잡았다. 마치 무도회에 들어가기 직전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내민 것과 같았다. 그러자 여자는 기쁘게 응하며 남자의 손을 맞잡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허리에 위치하고, 천천히 왈츠풍 음악이라도 나오는 듯 둘은 삼박자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왼쪽으로 돌면 남자의 등 뒤로 보이는 장면이 보인다. 그것은 아주 살벌했다. 멈출 생각 없이 휘몰아치는 눈바람 사이로 한 인영이 서 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울고 있었다. 아주 서럽게 분노의 찬 울음이었다. 여자는 눈을 끔뻑이며 다시 오른쪽으로 도는 남자의 행동에 맞춘다. 그럼 또 다른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아주 무서웠다. 분명 방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뭔가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가득 차 있는 것들 역시 울고 있었다. 그 울음은 아주 안쓰러웠다. 순간 여자는 발을 헛딛고 중심을 잃었다. 자신과 함께 춤을 추던 남자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결국 그대로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몸은 어딘가에 부딪히지도 않고 계속 떨어졌다.

 

장면과 장면이 빠르게 교차한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때 즈음 벌컥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정신 차려보라는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이. 정신차려봐.”

 

아, 꿈이었다.

 

정확히는…….

 

 

 

 

발신자 불명

 

 

열이 펄펄 끓는다는 하녀의 말에 펠릭스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어제 늦게 공작저에 도착한 베르티는 딱 봐도 상태가 좋지 못했다. 혼란한 왕국 내에서 제국 군에 저항하며 하루를 버티던 중이었다. 로드릭은 그녀에게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며 간간히 전투에 나서던 것이었다. 겨울에는 극악의 환경이었기에 몸이 성할 수가 없더라니. 근래에 무리하던 것이 몰아온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한 베르티를 걱정하는 제 어머니의 모습이 신경 쓰였는지 펠릭스는 식사가 끝나고 곧장 베르티를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인 것은 높게 오른 열 때문인지,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인지 감은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괴로워하는 베르티였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하녀를 지나쳐 그녀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잡고는 정신 차려 보라며 흔들었다. 순간 헉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번쩍 뜬 베르티는 여전히 가쁜 숨을 고르기에 급급했다. 겨우 정신을 차려서는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의 방이었다.

 

“괜찮은 거냐? 그러게 어르신이 무리하지 말라고 했을 때 하지 말았어야지.”

“……”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신다. 당분간은 영지에서 떠날 생각하지 마.”

“펠릭스. 전하는?”

“또.”

 

그는 쏘아붙이듯 할 말만 하고는 마지막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베르티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눈이 부신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이라도 하듯 창문에 있는 커튼을 모조리 치고는 그녀를 책임지는 하녀에게 방을 더 따뜻하게 하라고 했다. 베르티는 몸이 돌처럼 무거움을 느꼈다. 열도 많이 오르고 솔직히 말하면 다시 눈을 감고 자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잠에 드는 것이 어렵냐면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잠에 든 이후 혹시라도 다시 마주하게 될 그 현실과 같은 꿈이 괴로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몸은 아픈 베르티는 이런 상황이 썩 달가운 편은 아닌지 한숨을 푹 쉬었다. 베르티의 한숨을 들은 펠릭스는 어이없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가지 말라고 했을 때 말 들었어야지. 베르티는 제 형제는 눈치가 없다고 다시금 생각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보통이면 바로 나갈 펠릭스는 방문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베르티가 누워있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오늘따라 예상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의아하게 생각하며 눈을 끔벅이기만 하던 베르티였다. 펠릭스는 한쪽 다리를 꼬고는 팔짱을 꼈다. 그래. 저런 것만 보면 확실히 평소의 그 다운 모습인데…….

 

“책상 정리는 하고 나가도록 해.”

“내 방에 들어왔었어?”

“지금 들어와 있잖아. 일부로 보려고 했던 건 아니라고.”

“무슨 소리야?”

 

그러자 펠릭스는 고개를 베르티의 책상 쪽으로 향하게 끄덕였다. 책상 위에는 어지럽게 놓여있는 책들과 빼곡하게 뭔가 적혀있는 종이 여러 장, 뚜껑을 닫는 것을 깜박해서 다 굳어버린 잉크통이 있었다. 베르티는 그중 여러 장의 종이가 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아픈 것도 있고 순간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저걸 본거야?!”

 

어이. 갑자기 소리 지르지 마. 펠릭스는 미간을 구겼고 베르티는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가져올 기세로 이불을 홱 하고 걷어냈다. 하지만 곧장 펠릭스가 다시 바로 덮어버리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지만 베르티는 개의치 않았다. 뭔가 분하다는 표정으로 펠릭스를 바라봤다.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있잖아!”

“하?”

“어제 그냥 잘 걸 그랬어……. 피곤한데 괜히 써서는.”

 

펠릭스는 온전히 네 잘못이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베르티는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5년 전, 디미트리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나서 베르티는 디미트리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편지가 디미트리에게 닿을 일은 없었지만 그렇게 하나씩 쓰기 시작했던 편지는 출발도 못하고 그녀가 숨겨놓은 곳 상자에 쌓이기 시작했고,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미친 듯이 답답하거나 힘들고 어려울 때는 펜을 들었다. 글을 쓴다던가, 시를 쓴다던가의 능력은 없었지만 그리운 상대에게 편지를 쓰는 걸로 만족했다. 그립기만 한가. 그날 이후로 베르티는 하루도 빠지없이 디미트리 생각을 했다.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편지의 절반이 그 소문을 내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욕이 가득할 정도였다. 어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책상에 겨우 앉아 제국군에 대한 내용을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힘들고 괴롭지만 홀로 있을 당신은 더 외롭고 힘들 것 같아 감히 그런 말도 못 하겠다는 문장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몰래 해 왔던 것인데 어제는 바로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정리를 하지 못했고 커튼을 치던 펠릭스가 그 편지를 보게 된 것이었다.

 

베르티는 디미트리를 향한 감정을 다른 누구도 아닌 펠릭스에게 처음 털어놓았다. 처음이라 해봤자 펠릭스가 끝이었기에 아마 유일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펠릭스는 쓸데없는 짓이라며 시종일관 심드렁한 태도였지만 디미트리의 부재 소식이 들려온 이후 베르티의 곁을 가장 오랫동안 지켜준 사람이었다. 위로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옆에 서 있었다. 그러다 간혹 베르티가 말을 타고 나가야겠다고 하면 같이 가주는 정도였지만 베르티는 펠릭스의 그런 행동조차 없었으면 완전히 무너졌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편지를 우연찮게 발견했지만 대충 훑어도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베르티가 생각보다 더 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조금 당황했다.

 

“일기장이라도 들킨 기분이야…. 알고 있어?”

“……잘 모르겠는데.”

“들킨 적이 없으니까!... 너는! ... 아마 일기도 안 썼을 것 같네.”

“그런 걸 쓸 시간에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둘러.”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엄지로 꾹꾹 누르며 다시 푹신한 베개에 기대어 눕는 베르티를 보며 잠시 침묵하던 펠릭스였다. 그러다가 곧 결심이라도 한 듯 베르티에게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다며 입을 뗐다.

 

“5년 전에. 다른 녀석들이 한 약속 기억하고 있나.”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다시 모이자고 했던 그 약속. 당시에는 5년 뒤라는 시간이 막연하게 먼 미래 같았는데 정신 차려보니 금방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모일 수가 있겠는가. 그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시 청사자반 학생들이 모여야 하는데 중심에 있을 존재가 없어졌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조차도 모른다.

 

“지켜질 수나 있겠어? 지금 다들 어떤 상황인지 알잖아.”

“.......”

 

베르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당장 제 각자의 영지에서 바쁘게 지내고 있다. 소식이 안 들려오면 죽었다고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 시시콜콜 생사여부를 묻는 편지를 쓸 수도 없다. 펠릭스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로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자세를 몇 번이고 고쳤다가 이내 작게 숨을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어라.”

 

영문을 모르는 베르티는 이제 가는 거냐며 물었다.

 

“당분간은 푹 쉬도록 해. 어르신이 한 말이기도 하니까.”

“알았어.”

 

펠릭스가 문을 닫고 나간 방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와 얘기할 때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다시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아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는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았다.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곧 잠에 들 수 있을 것이다. 편지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기도 하고 더 이상 숨길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디미트리의 생사여부만 확인된다면 그것들을 모조리 태울 생각이었다. 솔직히 베르티는 펠릭스가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유 모를 확신이 점차 근거 있는 주장으로 바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베르티는 자고 일어나면 방 한편에 숨겨둔 상자를 통째로 태워야겠다 다짐했다.